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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속 인물 - 강상(강태공)

by Thanku22 2022.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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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 속 인물 - 강상(강태공)

 

강상의 초상에는 태공상(太公像)이라고 적혀 있다.  강상(姜尙)은 기원전 1072년 (주강왕 6년)에까지 나이가 139세에 달했다. 또 다른 중국의 기록에서는 강상은 기원전1140년 9월 12일(음력 8월3일)에 태어났다고 했다. 기원전 11세기 중국의 은나라를 멸망시킨 인물로 염제신농(炎帝神農)의 후손이며, 동해가 고향이다. 동해는 동해상으로도 불린다.성(姓)은 강(姜), 씨(氏)는 여(呂), 이름은 상(尙), 자는 자아(子牙)이며, 호는 비웅(飛熊)이다. 주왕이 항시 꿈에서라도 바라던 인물이 비로소 나타났다 하여 흔히들 태공망이라고도 불렸다고 전해진다. 강태공은 본관은 천수 강씨(天水姜氏)이며, 염제신농씨의 후손이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공신이며, 전국칠웅인 제(齊)나라의 왕이 되었다. 강태공의 자손들(강급, 강소백 등)이 대대로 제나라를 이끌어왔으며, 이 시기에 중국의 강강(姜), 고(高), 노(盧), 여(呂), 구(丘,邱), 정(丁), 최(崔), 시(柴), 허(許), 사(謝), 하(賀), 경(慶), 장(章), 제(齊), 신(申), 악(岳), 기(紀), 상(尙), 두(钭), 강(强)씨 등 총 102개의 수많은 성씨가 강태공의 자손으로부터 갈라져나갔다. 강태공 사당에는 해마다(매년 9월 12일 중국 산동성/제나라 문화축제) 강태공의 후손과 강씨에서 분파된 성씨가 대거 참례를 온다. 현재 강태공의 후손은 분성 성씨 외에 한국의 진주 강씨와 중국의 천수 강씨가 있다. 한국의 강태공(姜太公)의 후손 8개 성씨로는 진주강씨, (姜氏), 노씨(盧氏/교하노씨 등), 구씨(丘氏/평해구씨), 여씨(呂氏/함양여씨 및 성산여씨), 최씨(崔氏/충주최씨 및 전주최씨 대다수), 정씨(丁氏/압해정씨 및 나주정씨), 시씨(柴氏/태인시씨), 장씨(章氏/거창장씨)(姜氏), 노씨(盧氏/교하노씨 등), 구씨(丘氏/평해구씨), 여씨(呂氏/함양여씨 및 성산여씨), 최씨(崔氏/충주최씨 및 전주최씨 대다수), 정씨(丁氏/압해정씨 및 나주정씨), 시씨(柴氏/태인시씨), 장씨(章氏/거창장씨)가 있다. 강상은 염제(炎帝) 신농(神農)의 51세손이요, 백이(伯夷)의의 36세손이기도 하다. 주나라 문왕, 무왕, 성왕(成王), 강왕(康王) 4대에 걸쳐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춘추전국 시기의 제(齊)나라의 창시자요, 딸은 주 무왕의 왕후이다. 때는 기원전 1046년 2월 겨울, 상나라 주왕의 흉폭한 정치가 계속되어 천하가 비탄에 젖어 있을 시 홀연히 나타나주 문무왕의 스승이 되어 4만5천의 군사로 72만의 상군을 대파하는 기적적인 전쟁을 일구어낸 동이지사(東夷之士)이며 기인(奇人)이다. 이 전쟁을 목야전쟁(牧野戰爭)이라 하며,목야전쟁이 주는 의의는 적은 수로도 많은 적을 섬멸해낸 기적의 전쟁이며, 대륙을 통일한 천하통일전쟁이라 할 것이다. 이후 제나라를 일으키며 제1세대 초대 국왕으로 제나라는 32대 근 800여 년을 존속하였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의 스승이자 장인이며 천하의 스승국의 위치로 군림을 하여 제나라의 임금(제 태공)이 되었다. 제나라의 2대 군주의 지위를 큰아들인 강급(姜及)에게 물려주었고, 강급은 제 정공(齊 丁公)이라 불렸다. 강태공을 이어 제나라가 가장 흥한 시기는 제나라 16대 임금인 제 환공 강소백(姜小白) 시기로 강소백은 춘추시대 첫번째 패왕(覇王)이 되어 중국 천하를 호령하며 강태공의 뜻을 이었다. 제나라 최전성기에는 사방 5천리를 이룩한 대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강태공이 남긴 유명한 명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복수불반분"(한 번 엎지러진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인데 지금까지 흔하게 쓰이는 명언이다. 강태공의 전 부인 마씨는 강태공이 주문왕을 만나기 전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강태공 곁을 떠나는데, 이후 강태공이 제나라 왕이 되었을 때 다시 돌아와서 아내로 맞아주길 요청하였다. 이에 강태공이 하인더러 물을 떠오라고 한 다음 그 물을 땅에 엎었다. 그리고 돌아온 아내에게 지금 바닥의 그 물을 다시 항아리에 담는다면 아내로 맞이 해주겠다고 했다. 즉, 한 번 떠난 마음은 두 번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 것이다. 강태공은 기원전 1072년에 신선계에 들었으며, 그때의 나이는139세였다. 의관을 서주(西周) 호경(鎬京)에다 안장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강태공의 덕을 생각하여 제나라에다 강태공 의관총(衣冠塚)을 세웠다. 후대의 손무의 손자병법은 강태공의육도삼략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후일 대륙을 정복한 청나라 황실에서조차 강태공을 무성왕(武成王)으로 칭하여 천하통일을 이룬 주군으로 인정하였다. 강태공과 관련한 속담으로는 '강태공 위수 변에 주 문왕 기다리듯: 큰 뜻을 품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른말 / 강태공의 곧은 났기질: 강태공이 웨이수이강에서 곧은 났시질을 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데서, 큰 뜻을 품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한가한 나날을 보내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말. / 강태공이 세월 낚듯 한다 : 무슨 일을 매우 더디고 느리게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상팔십이 내 팔자 : 강태공이 가난하였던 처음 80년 동안과 같다는 뜻으로, 가난이 팔자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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