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보감 속 인물 _ 소열(유비)
소열황제 유비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이다. 자는 현덕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돗자리를 짜고 팔아 연명하다가 청년 시절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동리에서 약500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는 한나라의 황실 성씨였으므로 유황숙이라고도 불렸다. 유비는 탁군 탁현(직므의 허베이성 바오딩 시 줘저우 시)이 고향인 사람으로,'한나라의 황손' 이었다. 삼국지연의 에서의 표현으로는 그는 팔이 길어 그대로 뻗어 무릎까지 닿고, 귀도 남달리 커서 거울 없이도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상은 부처의 귀와 그밖에 특이한 모습을 조합하여 삼국시대 이후 기나긴 세월동안 민중의 바람이 만들어낸 영웅의 모습이었다. 유비는 어려서 아버지 유홍을 여의었는데,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멍석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 나갔다. 집안 동남쪽에 높이 다섯 길이 넘는 큰 뽕나무가 있어 그 모양새가 마치 황제가 타는 가마의 덮개처럼 보였는데,"이 마을에서 귀한 인물이 날 것이다"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어린나이 철이 없던 유비는 나무에 올라가 향리의 친구들을 내려다보며 자신도 이런 가마를 탈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고 한다. 이를 전해 들은 집안어른 유원기는 어린 유비에게 주의하기를,"함부로 황제의 가마를 타겠다는 말을 하지 말거라. 구족이 멸한다고 했다고 한다. 집안어른 유원기(劉元起)의 지원으로 그는 열다섯 살에 노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때 공손찬도 유비와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유비는 독서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았고 개나 말 같은 동물들을 좋아하였고, 화려한 의복을 걸치거나 음악을 듣는 일에 더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소싯적부터 명마(名馬)를 감별할 줄 알았고, 항상 말수가 적었으며, 늘 남을 공손히 대하였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황건의 난 때 장각(張角)은 청주, 유주, 서주,기주,양주,연주,예주, 형주 등으로 세력을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후한 말의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유비는 기꺼이 천하호걸과 교류했으므로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그의 맡으로 모여들었다. 그중에서도 관우, 장비와는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잘 정도로 유달리 친하여 그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황건적의 난에서 형주 웅거까지 영제 말,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주군(州郡)에서 모집함 의병들을 이끌고 교위인 추정의 군대에 가담해서 장순, 장거의 난을 진압하면서 그 공적으로 중산국(中山國) 안희현위(安喜縣尉)에 임명이 되었다. 그러나 이내 독우(督郵: 독우는 사람이름이 아니고 후한말에 있었던 하급 관리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조정에서 내려보낸 일종의 감찰사에 해당되는 직책이었다. 그당시 안희현을 시찰하고 있던 독우는 평소에 유비와 친분이 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가 유비를 쫓아내려 하였으므로 유비는 그를 현의 경계까지 끌고 가 곤장 200대를 때른 후 떠났다. 이후 단양에서 도위(都尉) 관구의 (毌丘毅) 의모병에 응하여 함께 행동하다가 하비에서 적을 무찌른 공로로 유비는 하밀승(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지만, 이내 그는 다시 관직을 버렸다. 그 뒤 유비는 고당위(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면서 현령으로 승진하였지만, 적에게 격파되어 공손찬에게로 달아았다. 공손찬의 휘하시절-공손찬은 유비의 동문으로 형제가 없었던 유비에게는 거의 친형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친밀한 존재였다. 공손찬은 유비를 조정에 천거하여 별무사마(別部司馬)에 제수되도록 조치하였고, 청주자사 전해(田楷)와 함께 기주목 원소(袁紹)와 싸우도록 하였는데, 그가 자주 전공을 세웠으므로 조정에 이를 보고하고자 표를 얼렸고, 덕분에 유비는 평원의 상(相)으로 임명되었다. 이윽고 조조가 서주를 정벌하자 서주목 도겸(陶謙)이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으므로 ㅇㅍ비는 전해와 함께 도겸을 돕게되었다. 이때부터 유비는 전해 밑을 떠나 도겸에게 몸을 의지하여, 예주자사에 임명된 후 소패에 주둔하였으며, 도겸이 죽은 후에는 도겸의 유지를 받들고 주위의 권유를 받아 서주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하비의 모든 호족들이 유비를 반겼던 것은 아니었던 터라 이 일은 훗날 유비가 여포에게 하비를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게된다. 공손찬 사후-196년(건안(建安)원년) 유비는 조조로부터 진동장군에 임명되어 원술(袁術)과 대치하게 되어 하비성을 비우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하비의 호족들 중 한명이었던 성문도 위 조표는 여포의 연합 세력의 한명이었던 진궁과 내통하여 배신하였다. 여포는 하비를 기습하여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유비가 여포에게 회친을 구하자, 여포는유비의 처자를 유비에게 되돌려보냈었고, 유비는 소패에 내몰려졌다. 그러나 소패에서 유비가 1만여 명의 병사를 모집하자, 여포는 이를 꺼림칙하게 여겨 유비에게 공격을 감행하였다. 유비는 패주하여 조조에게 귀부하였는데, 조조는 유비를 후대하여 예주목으로 삼았고, 유비가 소패에서 군사를 모아 여포를 견제하는 것을 지원하였다. 이에 여포는 고순을 보내 소패를 공격하였고, 조조는 하후돈(夏侯惇)을 지원군으로 보냈으나, 결국 유비와 하후돈은 고순에게 패배하여 다시 유비의 처자는 사로잡혀 여포에게 보내졌다. 10월, 이에 조조는 친히 여포를 정벌하여 유비와 함께 하비를 포위하였는데, 여포의 부장 후성, 송헌, 위속 등이 배신하여 여포를 옭아 맨 뒤, 조조의 군세를 성아능로 맞이하였다. 여포가 자신을 살려 쓰도록 조조에게 말하였고 조조가 의심을 품자, 유비는 여포가 앞서 행하였던 패악을 조조에게 귀뜸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조조도 이에 동의했다. 조조는 여포를 교수형에 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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